Commission

A Friend

시/차
Time/Perspectives
2023.7.21-7.30

시차의 시각 차이는 '시각(time)'일 수도, '시각(view)'일 수도 있을 터. 우리에겐 지금 얼만큼의 시차가 있을까? 지금 소위 ‘울트라 컨템포러리’로 불리는 동시대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도 시간이 지나면 과거의 산물이 되고 말 테다. 수많은 텍스트와 방대한 스케일, 가변 설치, 개념들은 지금 우리에게 동시대의 생생한 감동과 생각해보지 못했던 담론들을 일깨워주곤 하지만, 그 다양한 작업들의 범위와 시각성이 우리를 피로하게 만드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새까만 글자들을, 빼곡한 작업 노트를 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작업들 투성이니까. 때때로 무언가를 느껴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에, 혹은 지성인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에 갤러리에서, 미술관에서 억지로 무언가를 감상하며 그저 배회하곤 했던 적이 과연 없을까? 스스로가 멍청하게 느껴졌던 순간들은? 물론 여기 있는 작품들도 마냥 감상이 이해로 직행되진 않을지 모른다. 맥락과 배경을 알고 나면 훨씬 좋아지는 작업들은 있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간단한 캡션과 작가 설명을 준비했다. 이 작품들은 주로 60-80년대의 지나간 한국 근현대 미술과, 오래된 고미술품들이다. 진짜 ‘컨템포러리’란 무엇일까. 역사는 괜찮은 오답 노트라는 말을 기억한다. 이것은 우리가 소박하게나마 정리해둔 나름의 오답 노트이다. 또 누군가에겐 이것이 컨템포러리며 동시대일지 모른다. 분명히 우리는 그 오답 노트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배우며 성장할 수 있으니까. 지금 여기에서 그려질 당시에는 채 발견하지 못했던 아름다움과 이야기들을 찾아낼 수도 있다. 시차는 늘 존재한다. 또 존재해왔다. 2023년을 살아가는 80, 90, 00년대생들에게 이미 지나가버린 이 오래된 작품들을 지금 감상한다는 건 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게다가 그 핫하다는 한남동 한가운데의 작은 전시장에서. 많고많은 옛 작가들 중 23년의 젊은 우리에게 들려줄 이야기와 아름다움이 있을법한 작가들의 작품을 골라보았다. 그리고 독특하고 근본없는 배치를 곁들였다. 흘러가버린 작품들의 경우, 지금 젊은 우리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마치 우리네 옛 어른들처럼. 여기 퍽 좋아하는 말을 첨부 해본다. "모든 명화는 현재형으로 다가온다."

장욱진, 윤광조, ﹤도자화﹥, glazed ceramic, 1977
장욱진, ﹤Untitled﹥, oil on canvas, 1977
Pierre Jeanneret, ﹤Stool with Triangle Base﹥, teak with metal, ca.1960

장욱진(b. 1917) 술과 가족을 엄청나게 사랑했던 화가.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마치 술 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기도. 특유의 아이같은 화풍 때문에 아이가 그린 그림으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휴지 등으로 테레핀유를 닦아내며 독자적으로 개척한 화풍이다. 실제로 아이들이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평생 작은 소품만을 고집했다. 이것은 타고난 성정과도 같을 것이다. 작은 캔버스이지만 나름의 구성과 운율, 건축적 구도를 느낄 수 있다. 그 역시도 동양과 서양화 사이 어딘가를 개척한, 컨템포러리 화가다. 작품은 그가 잠시 살았던 서울 명륜동에서 그려졌다.

표암 강세황, ﹤수선﹥, ink on paper
이대원, ﹤산﹥, oil on hardboad, 1984
이대원, ﹤담﹥, oil on canvas, 1976

표암 강세황(b. 1713) 조선의 문화 르네상스로 여겨지는 영정조 시대에 예원의 총수이자 단원 김홍도의 스승으로 일컬어지는 인물. 시서화 삼절. 집안의 3대가 모두 기로소에 들어가 ‘삼세기영지가’가 되는 영광을 누렸다. 얼핏 운만 좋게도 들리는 삶이지만, 젊은 시절엔 안산으로 낙향했으며, 환갑이 다 되어서야 겨우 벼슬길에 올랐다. 평생 후진을 양성하고 수많은 그림에 평론을 하였으며 작품들도 다수 남겼다. 서양화 기법인 명암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작품은 작은 고아한 수선화와 그에 대한 글이 남겨져 있다. 이대원(b. 1921) 박수근과 같은 독학파 화가. 특유의 아름다운 색채와 터치 때문에 행복의 화가로 불리기도 하지만, 6.25때 시체들을 치우던 기억을 지울 수 없었다는 고백이 남아있다. 반도 호텔에서 최초의 화랑이었던 반도 화랑을 운영했으며, 역시 박수근을 사랑했다. 파주에 농원을 사고 그 농원과 과수원, 산 등을 점묘 법으로 많이 그렸다. 그러나 그의 젊은 시절 그림들을 보면 동양화의 기법과 서양화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했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결국 동양화와 서양화 어딘가의 경지를 찾아낸 화가가 아닐까. 윤형근처럼. 방식은 아주 다르겠지만.

한영수, <서울 정동 덕수궁>, toned gelatin silver print, 1956﹣1963
최병소, <TIME>, ballpoint pen and pencil on newspaper
오윤, <검은 새>, woodcut print and color on Korean paper, 1980

한영수(b. 1933) 50년대의 서울을 많이 담았던 사진가. 지금 보아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매우 세련됐다. 그의 사진은 강요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50년대 명동의 어느 벽의 남녀다. 전쟁 직후에도 젊은 청춘남녀의 삶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의 사진들을 보다보면 이런 옷차림이 그 당시에 가능했다니, 이런 앵글이 가능했다니.. 하는 수많은 물음표가 따라붙는다. 우리가 체험해보지 못한 50년대의 서울과, 2023년 우리의 시차는 얼마나 나고 있을까. 최병소(b. 1943) 신문지를 볼펜과 연필로 지우는 반복적 작업으로 유명하다. 혹자는 이 단색 때문에 단색화와의 연관성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방법론이 다르지 않을까. 실험미술적인 설치 작업들도 일찍이 많이 수행했다. 그가 신문지나 잡지들을 지워가며 했을 생각들을 떠올려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타임' 이라는 잡지, 혹은 명제에 대하여. 오윤(b. 1956) 80년대 민중미술의 대표자이자 해학과 전통을 신명나게 판화로 보여준 판화가. 미술의 사회적 역할에 큰 관심을 가지고 대학 시절부터 민화, 불화, 전통 춤 등에 대한 연구를 해나갔다. 42세에 요절. 그의 작품은 주로 날카로움과 신명남이 가득하나 독특한 이 작은 까마귀는 전시장 가장 높은 곳 구석에서 모두를 웃으며 내려다보는 것만 같다. 자꾸 보다보면 눈을 마주칠지도.

박수근(b. 1914) 독학으로 경지를 이룬 화가. 특유의 화강암과 같은 마티에르는 그만이 개척한 독자적 화풍. 단순화된 선과 구도, 토속적 배경 때문인지 생전에도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오히려 외국인들이 그당시 모던하다고 느끼지는 않았을까.) 작품의 정경은 그가 살았던 창신동 주변으로 보인다. 꼭 콘크리트 벽에서 자라난 그림 같지 않은지. 작은 소품이지만 공간을 장악하는 힘이 대단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레이어에 겹겹이 쌓인 파랑, 노랑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백영수(b. 1922) 김환기, 이중섭, 장욱진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추상화가 단체였던 신사실파의 회원이다. 96세로 가장 오랫동안 살았다. 신사실파 구성원들의 요소들이 그의 그림에서 보인다. 맑은 색과 절제된 화면이 특징. 가족의 풍경을 단순화해서 많이 그렸다.

손상기(b. 1949) 39세의 나이로 요절. 어렸을 때의 사고로 곱추가 되었다. 남들보다 1/3의 폐활량으로 아현동의 비좁은 단칸방에서 힘들게 그림을 그렸으며, 그래서 그가 그린 그의 화실 주변의 재개발 전 80년대 서울의 풍경들은 그 흰, 회색 벽이 아주 높다. 남들보다 낮은 시선으로 보았을 테니까. 여기 ‘자매’는 그의 두 딸들로 보여진다. 그러나 어려운 몸으로 그는 좌절하지 않았으며, 우리는 그의 작품들에서 묘한 희망과 서정, 봄을 바라는 마음을 볼 수 있다. ('골목의 봄' 이라는 제목과, 핑크색 터치에서 보이듯) ‘에어컨 밑에서 오렌지나 그리는 화가’들을 싫어한다는 말이 노트에 적혀 있는데, 그게 소위 귀족적 화가로 일컬어지던 도상봉 등을 특정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번엔 그의 작품을 높이 올려다보는 것은 어떨까. 그가 평생 올려다봤을 아현동의 높디높은 시멘트 벽처럼. "서울-공작도시/ 장애물이 많은 도시/ 나에게 서울은 벅차다/ 육교, 지하도, 넓은 건널목 그리고 소음/ 한 겨울에 에이는 추움/ 밀리는 사람들의 표정 없는 얼굴들 모두가…./ 나처럼 생긴 모든 자의 어려움이리라..."

권옥연, <정물>, oil on canvas
도상봉, <정물>, oil on canvas, 1968

권옥연(b. 1923) 김종학과 더불어 고미술을 가장 사랑한 화가이다. 호랑이 같은 외형을 가졌지만, 소녀와 아름다운 풍경들을 많이 그렸다. 특유의 암울한 회청빛 컬러가 특징. 프랑스에서도 수학했다. 박수근을 존경했으며, 권진규의 먼 친척이기도. 도상봉과 구도는 비슷하나 색채와 마티에르의 대비가 재미있다. 도상봉(b. 1902) 김환기와 함께 백자 항아리를 너무 사랑하여 호가 도천(도자기의 샘). 주로 정물을 고전적인 기법으로 표현했다. 한 눈에 그의 그림인 걸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무척 아름다운 시그니쳐가 특징. 혹자는 귀족적인 그림이라고 하지만, 이 정도 경지의 시각적 완성도를 보여준 화가도 많이 없을 것이다. 그의 그림은 사람을 몽글몽글하게 만든다.

겸재 정선, 원교 이광사, <낙산사>, ink on color on silk, 18c
작자 미상, <묘도>, ink on color on paper

겸재 정선 (b.1676), 원교 이광사 (b.1705) 양양에 있는 유명 절인 낙산사를 그리고, 기존 시를 초서로 유명했던 이광사가 써서 서화 합벽을 했다. 그림 뒷면에는 ‘다섯 오’자가 써 있는데 아마 둘이서 콜라보레이션했던 서첩의 5번째 작품이 아닐까 한다. 옹기종기 앉거나 서서 얘기를 나누는 선비들이 아주 귀엽다. 지금은 없어진 낙산사의 건물들도 보인다. 무엇보다 일품은 겸재가 세필로 바다와 해를 그려내는 방식이다. 조선 시대에는 시가 글이고, 글이 그림이며, 동시에 그림이 시였다 (시서화 삼위일체). 지금은 모든 것들이 전문화, 분업화되어 시인이 있고, 화가가 있고, 작가가 있겠지만! 작자 미상 언제 그렸는지 모르는 (조선 후기거나 구한말일 법한) 작은 두 점의 고양이 그림이다. 이때는 뒷모습의 고양이를 그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는 재밌는 일화가 전한다. 누가 그렸는지 알 수 없는 작은 고양이 그림이지만,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면 어떤가? 나름의 소박함과 안온한 재미가 전한다.

곽인식, <Work 84 B>, colored ink on Japanese paper laid on canvas, 1984
김환기, <새>, gouache on paper, 1960

곽인식(b. 1919) 사물의 물성을 탐구, 미술로 적용시킨 선구자. 이우환에게 돌을 깨는 방법을 알려주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지만 진실은 알 수 없다. 한국보다는 일본에서 오래 활동했으며, 평범한 회화보다는 물성을 실험하는 데 집중, 시대를 앞서나가는 작업들을 남겼다. 이 작품은 그의 말년, 종이에 돌로 찍어그린 ‘채묵화’다. 흐르는 강가나 냇가에서 돌을 종종 주웠다고 한다. 김환기(b. 1913) '비싼 값'으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사람. 글과 일기도 많이 썼으며, 나름의 문인화 정신을 실천하지 않았나 싶다. 실제로 문인들과도 친분이 깊었다. 1930년대 일본 수학 때부터 자연의 추상적인 구현에 힘쓰다가, 1970년대 뉴욕에서 특유의 '전면점화' 기법을 창안했다. 그러나 74년에 소천하였다. 늘 자연을 소재로 두꺼운 마티에르를 구사하다가 말년에 가면 마치 한지 안으로 스며드는 듯한 아주 묽은 화풍이 된다. '달항아리'라는 말의 창시자 중 하나로 여겨지며, 2023년의 우리조차 아리송한 '한국적'인 것을 모던하고 세련되게 구사하려 힘썼다. '환기 블루' 라는 말이 있을만큼 파랑색을 많이 썼다. 그는 키가 아주 크고 목이 길어 동료들이 그를 학이라 부르곤 했다는데, 이 학은 그의 또다른 자화상일지도 모르겠다. "세계적이려면 가장 민족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예술이란 강렬한 민족의 노래인 것 같다." "나는 그림을 팔지 않기로 했다. 팔리지가 않으니까 안 팔기로 했을지도 모르나 어쨌든 안 팔기로 작정했다."

유영국, <Work>, oil on canvas, 1981
오치균, <은행나무>, acrylic on canvas, 1997
이대원, <담>, oil on canvas, 1976

유영국(b. 1916) 유영국을 설명할 때 늘 등장하는 말이 김환기와 함께 한국 추상의 양대 거두라는 말인데, 이 역시 사실일 수 있으며 둘 모두 신사실파의 구성원이었지만 둘이 추구하는 것은 꽤 달랐다고 생각된다. 일본에 수학할 시절부터 아주 엄격하고 기하학적인 구성과 전위성을 추구했으며, 평생 울진에서 보았던 산의 형태, 자연의 형태를 색과 기하학으로 풀어내는 데 헌신했다. 지금 보아도 믿기지 않는 세련된 화풍. 다만 작품은 산이 아닌 나무들이다. 맞은편에 걸린 윤형근의 기둥과의 조형적 대비가 재미나다. 오치균(b. 1956)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지두화가 (임파스토 기법). 이 작품 역시도 손으로 그렸다. 그의 작품는 보통 인물이 나타나는 경우가 극히 드문데, 구도적 안정성 때문인지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작은 행인이 보인다. 충남 산골 출신으로 젊은 시절 어렵게 뉴욕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사기를 당하여 줄곧 궁핍한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그의 초반 뉴욕 그림들은 이 작품과는 상반되게 아주 어둡고 절망적이다. 그러나 봄은 오듯, 2000년대 중반 미술 시장 광풍 당시 엄청나게 작품 값이 상승해 화랑 앞은 그의 그림을 원하는 사람들로 문전성시였다고 한다. 한편 2010년대 단색화 열풍이 닥친 후부터는 시장의 상황이 많이 달라진 것 같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매우 포에틱한 동시에 솔직하다. 이것도 어떠한 경지가 아닐지.

박고석, <쌍계사 길>oil on canvas
이대원, <산(도봉)>, oil on canvas, 1973

박고석(b. 1917) 강렬한 터치와 색채 대비, 격정적 붓질, 한국적 표현주의의 꼭대기 중 한 사람. 특히 산을 많이 그렸다. 남긴 작품 수가 많지 않은 편. 이중섭, 황염수의 친한 친구이기도. 작품의 쌍계사는 하동에 있는 절인데 그는 이 절을 특히 좋아했는지 여러 점을 남겼다. 쌍계사는 벚꽃이 퍽 유명하다. 그는 종종 벚꽃이 만개한 쌍계사의 봄을 그렸다.

최욱경, <Untitled>oil on canvas, 1966
황염수, <양귀비>, oil on canvas
황염수, <오미자>, oil on board, ca.1954
황염수, <장미>, oil on canvas, 1977
황염수, <장미>, oil on canvas

최욱경(b. 1917) 60-70년대에 미국에서 유학했던 여성 화가. 추상표현주의, 드 쿠닝, 조지아 오키프가 떠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인 그녀는 특히 말년 작품에서 한국의 자연에 많은 영감을 받았고, 또 그렸다. 시와 글도 많이 썼으며, 한국에서 여성 화가로 활동하기 어렵던 시기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에는 우선 화려한 색채 외에도, 분노아, 미국에서 받았을 영감들,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뮤럴급 대작들을 사다리를 타고 담배를 피우며 그리곤 했다. 황염수(b. 1917) 이중섭과 박고석의 죽마고우. 평생 장미를 많이 그렸다. 얼핏 귀족적으로 보이는 그림과 다르게 평생 검소하고 절약하는 삶을 살았다. 장미만큼은 비싼 걸로 샀다고 한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장미 자체가 아니라 장미 너머의 그 어느 아득한 시야가 아닐까. 소위 사모님들이 많이 좋아하는 그림이라고 해서 종종 오해받기도 하지만, 그의 그림에서도 시대를 살아냈던 어떤 격이 느껴지곤 한다. 장미 너머의 어딘가ㅡ 그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왜 장미만 그리냐'라는 물음에 그는 그저 ‘마음대로 바꾸기 좋은 대상’이라 답하곤 했다. "나는 장미를 그대로는 그리지 않는다. 그대로 그리려 하면 자꾸 다른 꽃들이 튀어나온다. 내 그림의 목적은 장미라는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라 장미가 내 마음 속에 던지는 어떤 ‘부딪힘’이다. 미술이 해야 할 역할은 현실의 장미보다도 더 높은 차원에 있는 그 무엇을 그려내는 일일 것이다."

우봉 조희룡, <묵매도>, ink on paper

우봉 조희룡(b. 1789) 매화를 얼마나 좋아했던지 호 중 하나가 ‘매수’였다. 이 그림은 하얀 매화를 그리고 1월 1일에 길한 마음을 담아 글을 쓴 그림이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기도 했는데, 추사 김정희가 추구했던 소위 '문자향 서권기', '졸함'이 없다고 그가 독설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추사는 평생 빼고 또 빼는 소위 미니멀리즘과 비슷한 졸함을 추구했지만, 우봉의 매화는 구름 같기도, 용 같기도 한 것이 퍽 화려하다. 둘 다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윤형근, <Burnt Umber&Ultramarine>, oil on linen, 1991
윤형근, <Umber﹣Blue>, oil on linen, 1978

윤형근(b. 1928)은 평생 불의와 싸웠던 화가로 김환기를 존경했으며 그의 사위이기도 하다. 또한 젊은 시절의 화풍 (60년대)은 그의 반구상 작품들과 굉장히 흡사하나, 많은 시대적 사회적 시련을 겪고 장인에게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서양의 캔버스와 오일이지만 마치 수묵화를 보는 것만 같다. '침묵의 화가'로 일컬어지지만, 그의 까만색 기둥에는 그가 겪어야 했던 일생의 시련과 울분이 모두 담겨 있다. 단색화 작가로 분류되지만 그의 그림은 사실 땅을 뜻하는 '엄버'와 하늘을 뜻하는 (어쩌면 김환기의 색) '블루'가 합쳐진 엄버 블루이지, 단색이 아니다. "내 작품 안에 청춘의 공백 같은 게 나타나 보일지 몰라요. 도망다니다 쫓겨 다니고 공포와 불안 속에서 살아남는 것만이 제일 큰 문제였지요." "나는 내 보잘것없는 그림들이지만 그 그림들을 흙벽에 걸고 싶다. 그 흙벽에 잘 어울리는 그 무엇을 그려보고 싶다. 이 세상이 아무리 세월이 가도 영원히 아름다운 것은 흙과 나무와 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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